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잭슨 (문단 편집) == 영향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마이클잭슨 .jpg|width=100%]]}}} || >마이클 잭슨이 그의 뒤를 잇는 팝스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들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ㅡ [[롤링 스톤|Rolling Stone]]/ [[https://www.rollingstone.com/feature/michael-jacksons-indelible-pop-legacy-105243/|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com/2009/06/26/arts/music/26jackson.html|A Star Idolized and Haunted Michael Jackson Dies at 50]] [[영국]] 대학 연구팀이 17,000개의 [[빌보드 핫 100]]에 오른 곡들을 분석한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5/06/0200000AKR20150506153400009.HTML|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1983년]](마이클 잭슨, 더 폴리스, 유리스믹스 등의 팝스타와 신기술의 유행) [[1991년]](힙합의 황금기)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Thriller]] 앨범으로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 1982년 말 발매된 스릴러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37주간 1위를 기록하며 1983~84년 두 해 연속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발매 1년 3개월 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을 제치고 [[http://www.guinnessworldrecords.com/news/60at60/2015/8/1984-best-selling-album-of-all-time-392913|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됐고 현재까지도 누적 6,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스릴러 앨범 발매 전 세계 음반시장은 전례없던 역대 최악의 불황기였다. 미국의 [[CBS(미국 방송)|CBS]] 직원들은 1982년 8월 13일을 [[https://www.billboard.com/articles/news/268212/exclusive-how-michael-jacksons-thriller-changed-the-music-business|검은 금요일]]이라 불렀는데 이날 대규모 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릴러가 대박나면서 음반시장은 다시 초호황기를 맞았다. 마이클도 앨범 발매 전에는 200만 장만 팔아도 성공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자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 가장 거대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인기있는 단일현상이라고 [[http://amp.timeinc.net/time/5033766/thriller-michael-jackson-anniversary|보도]]했고 [[롤링 스톤]]은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을 흑백 인종의 벽을 부순흑인인가수라 평가했다. 2013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실시한 [[https://www.prnewswire.com/news-releases/new-national-survey-reveals-the-republican-candidate-who-could-have-defeated-president-obama--ronald-reagan-202138171.html|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1980년대 뮤지션으로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1위로 뽑았다.[* 2위 [[마돈나]] 17%, 3위 [[U2]] 12%. 미국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오차범위 ± 3.1%.]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존의 [[미국 흑인]] 음악 스타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흑인이라면 마땅히 소울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하며[*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1 페이지] 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이었다.[* 박광순 문화평론가, [[https://music.bugs.co.kr/recomreview/series/view/261|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물론 그럼에도 [[지미 헨드릭스]], [[척 베리]] 등 록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들은 이전에도 드물지만 있었다.] 허나 [[뉴욕 타임스]]의 당시 [[https://www.nytimes.com/1984/01/14/arts/michael-jackson-at-25-a-musical-phenomenon.html|칼럼]]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록 음악|록]]인지 [[펑크(음악)|펑크(Funk)]]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딱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한 음악이었다. 즉,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사운드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박은석 음악평론가,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jsessionid=ZGhfaWpTO8gCGlSz4fwlKJrJq7i8ScCAE9OJTQpey952OT3C09WaGiD4ypvPCvag.newswas02_servlet_engine1?ncd=1802118|전설이 된 잭슨, 그의 음악과 인생]]] 이는 결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고영탁 음악평론가는 '소울, 펑크, 재즈 등 대표적인 흑인음악과 록, 팝, 발라드 같은 백인음악이 그의 음악에 하나로 녹아있다. 말하자면 흑백 음악의 통합을 이뤄낸 것으로 전례없던 인종대화합의 음악'이라고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0888753|평했고]]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http://www.hani.co.kr/arti/PRINT/382888.html|#]] 이러한 마이클의 음악은 당시 공공연하게 남아 있었던 인종적 취향의 벽을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뉴팝'이라고도 불렸고[* 박은석 음악평론가,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누가 마이클 잭슨을 죽였나' 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영국 음악의 영향력에 억눌려 있던 [[미국]]의 음악이 다시 주도권을 탈환하고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정일서 [[KBS]] [[라디오]] [[PD(방송)|PD]]('365일 팝 음악사' 저자), [[http://weekly.donga.com/Library/3/all/11/76871/1|‘X&Y’ 빌보드 3주 연속 1위 … 미국 시장서 선전]]] 동시에 [[록 음악|록]]의 시대에서 [[대중음악|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https://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4789|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다만 마이클 잭슨이 [[헤비메탈]]에서 [[팝메탈]]로 발전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는 [[임진모]]의 평가는 전후가 잘못되었다. 팝메탈은 따져보면 그 뿌리가 [[하드 록]]이었는데 하드 록의 전성기는 70년대였고 정작 [[헤비메탈]]은 마이클 잭슨이 활동하던 80년대가 전성기였다. 임진모의 평가는 아직 정립되지도 않은 장르가 시작도 전에 시들해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은 록의 사운드를 팝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고, 이 시도를 통해서 파워 팝이 발전하게 되었다. >잭슨이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만든 사운드는 펑크(funk), 올드스쿨 소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재즈, 디스코 그리고 락의 요소도 매끄럽게 혼합되어 있어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1979년작 Off The Wall 앨범에서도 관찰할 수 있지만 완전히 구현된 것은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가볍게 즐기기 위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 댄스무대용 음악과 헤드폰용 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메인스트림 팝을 완전히 뒤바꾼 1982년 발매된 걸작 [[Thriller]] 앨범에서였다. >----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 / LA 타임스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2009-jun-26-me-jackson-appreciation26-story,amp.html|A performer who kept transcending boundaries]]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Thriller]]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 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웅진뮤직 [[http://izm.co.kr/sub_cate/v_year/source/97year/w19970400a.htm|기고문]])[br][br]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서 '젊음의 코드, 록') >---- >[[임진모]] 음악평론가 || [[파일:그래미 84년.jpg|width=100%]] || ||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어 한 해 가장 많은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뮤지션으로 기록됐다.[* 후에 2000년 [[산타나]]도 8개 부문을 수상해 동일 기록이 됐다. 참고로 1984년은 그래미 역사상 가장 압도적으로 시청자수가 많았던 해이기도 하다. 시청률 30.8%에 미국내 시청자수만 5,167만명으로 [[https://en.m.wikipedia.org/wiki/Grammy_Awards|집계]]됐다.] || 시대가 이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1980년대는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시절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1983년에 진행한 MTV와의 [[http://www.latimes.com/entertainment/music/posts/la-et-ms-david-bowie-mtv-interview-race-racism-transcript-20160112-story.html|인터뷰]]에서 대놓고 MTV는 백인중심주의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1970년대 중반에 디스코 열풍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에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마이클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hot 100 차트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https://www.criticalminded.com/2016/11/28/80s-black-pop-crossover/|차지]]했다. 빌보드는 아직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1979년과 비교했을 때 1982년까지 핫100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의 비중이 거의 80%나 감소했다며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거의 바닥이었다고 [[https://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pop-shop/473949/michael-jacksons-thriller-at-30-how-one-album-changed-the-world|분석]]했다. 디스코 열풍의 시기에도 물론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에 밀려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은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과 [[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황제로 대접받았다. [[롤링 스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혔던 문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며,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는데 특히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고 [[https://www.rollingstone.com/music/features/the-year-in-music-19831222|분석]]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뮤직 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Billie Jean]]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미국 방송)|CBS]]는 MTV에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열어줬다며 [[https://www.whitneyhouston.com/news/whitney-shares-her-thoughts-michael-jacksons-passing/|감사]]를 표했다.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앨범을 단 두 장만 발매했음에도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http://amp.timeinc.net/time/5033766/thriller-michael-jackson-anniversary|보도]]했을 정도이다.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타이거 우즈]]와 [[버락 오바마]] 이전에 흑인 뮤지션들이 세계 대중문화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흑인 뮤지션들을 흉내 내며 자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news/michael-jackson-black-superhero-71199/amp/|#]]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br][br]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 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 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br][br]흑인 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 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임진모]] 음악평론가/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9204&bigcateidx=19&subcateidx=41&view_tp=1|마이클 잭슨 9주기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 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다시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 >[[빌보드]]/ [[https://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pop-shop/473949/michael-jacksons-thriller-at-30-how-one-album-changed-the-world|Michael Jackson's 'Thriller' at 30: How One Album Changed the World]] || [[파일:빌리진 뮤직비디오2.jpg|width=100%]] || || 흑인 뮤지션 사상 최초로 [[MTV]]에서 헤비 로테이션된[* 마이클이 [[MTV]]에 나온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1983년 [[데이빗 보위]]가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흑인 뮤지션 중 극소수만, 그것도 주로 새벽시간대에만 방영이 허가되는 등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24시간 언제든 방영될 수 있는 헤비 로테이션으로 마이클이 흑인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길을 냈다는 의미이다.] [[Billie Jean]] 뮤직 비디오의 촬영 중 잠깐 쉬는 장면. || || [[파일:뱅가드 어워드.jpg|width=100%&height=100%]] || || [[MTV]] 평생공로상인 마이클 잭슨 비디오 뱅가드 어워드. 1991년부터 마이클의 이름을 따서 시상하고 있다. || 또한 마이클은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마이클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http://gonggam.korea.kr/newsView.do;JSESSIONID_WEEKLY=d3KZyIH3tZkdYNs_MsmugYpmWmiDFyL_K2W7iPIO7wj-EnyvSTVo!-1411820853!554042036?newsId=148680685§Id=gg_sec_11&pageIndex=161|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뮤직 비디오]]와 [[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 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http://abc.go.com/shows/billboard-music-awards/news/press-releases/05082014-watch-michael-jackson-make-television-history-on-the-2014-billboard-music-awards-live-on-abc|분석]]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라디오]]가 여전히 주요 음악 소비 매체 중 하나였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익숙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MTV]]는 초기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좀비 소재를 이용해 최초로 13분짜리 단편영화 콘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MTV는 종일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고 덕분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채널이 될 수 있었다.[* 차우진 음악평론가, [[https://m.music.naver.com/recommend/magazine.nhn?articleId=490|뮤직 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 영구보존작으로 선정[* [[http://www.mtv.com/news/1628945/michael-jacksons-thriller-added-to-national-film-registry/|#]]]돼 현재까지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자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 비디오 1위, 또 제작 과정 등을 담은 필름 영상만 900만 부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북]]에 등재된 것이 바로 마이클의 이다.[* MTV 선정과 기네스 등재 자료 [[http://www.mtv.com/news/1614750/michael-jacksons-music-video-legacy/|출처]]] 빌보드는 뮤비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로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으며 이러한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 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 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http://abc.go.com/shows/billboard-music-awards/news/press-releases/05082014-watch-michael-jackson-make-television-history-on-the-2014-billboard-music-awards-live-on-abc|평가]]했다. 마이클의 이와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 비디오와 보는 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존 파렐스 음악평론가가 마이클이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고 [[https://www.nytimes.com/1984/01/14/arts/michael-jackson-at-25-a-musical-phenomenon.html|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엔 [[댄스 음악]], 댄스 가수라는 수식어가 없다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이클과 함께였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https://youtu.be/N4hizHIGpIY|흑인음악-아프로 아메리칸 뮤직]] & [[http://gonggam.korea.kr/newsView.do;JSESSIONID_WEEKLY=d3KZyIH3tZkdYNs_MsmugYpmWmiDFyL_K2W7iPIO7wj-EnyvSTVo!-1411820853!554042036?newsId=148680685§Id=gg_sec_11&pageIndex=161|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로봇춤을 유행시켰고 이후 <[[Beat It]]>, 등 뮤직 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집단 군무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문워크]]와 린댄스라는 획기적인 춤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Dangerous]]>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뉴욕 대학교]] 공연연구학 교수 타비야 녕오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어떤 댄서도 마이클 잭슨만큼 댄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https://www.nydailynews.com/entertainment/michael-jackson-dancer-moved-measure-gifts-jackson-dance-genius-article-1.373191?outputType=amp|평가]]했을 정도.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마이클은 앞서 말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전설적인 댄서들이 이름을 올렸던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2010년 헌액 됐는데[* [[https://www.saratogian.com/news/inside-saratoga-dance-museum-inducts-michael-jackson/article_e5abf30a-a0c0-5275-af64-602b6cbc4bb9.html|#]]], 이는 전문 댄서가 아닌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미국의 인기 댄스오디션 TV프로그램《So You Think You Can Dance》의 총괄 PD이자 심사위원이었던 나이젤 리스고에 [[https://www.nydailynews.com/entertainment/michael-jackson-dancer-moved-measure-gifts-jackson-dance-genius-article-1.373191|의하면]] 수많은 지원자들이 춤을 추게 된 계기로 마이클 잭슨을 꼽았다고 한다.]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특히 [[Dangerous]] World Tour가 [[대중음악]]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며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1820770|평가]]했다. 대표적으로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 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Smooth Criminal]] 공연에서 등장하는 초대형 스크린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 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 >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MTV 와 뮤직 비디오 발전의 1등 공헌자.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MTV 와 뮤직 비디오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이 내놓은 싱글들은 대부분 뮤직 비디오를 동반했고,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놀라운 영상 미학을 구현했다. 마이클은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음악팬들을 MTV 앞으로 이끌었다. 그의 뮤직 비디오는 단순히 뮤직 비디오가 아니라 쇼트 필름이라 말할 정도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은 영화다. 쟁쟁한 영화감독들을 초빙해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특수효과를 갖춰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 >고영탁 음악평론가/ 오이뮤직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0888753|2003년 3월호]]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 >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https://www.hankyung.com/news/amp/2014062617294|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 [[파일:모타운 빌리진.jpg|width=100%]] || || 마이클이 처음으로 [[문워크]]를 선보인 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빌리진]] 공연의 한 장면. 음악평론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이 공연 이후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저서 'Present Tense'] 이 공연은 2013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폴이 자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한 [[https://theharrispoll.com/new-york-n-y-november-19-2013-with-all-the-major-events-going-into-the-history-books-over-the-past-50-years-which-do-americans-most-wish-they-could-have-witnessed-firsthand-thats-what-the-h/|조사]] <지난 50년간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건> 7위에 올랐다.[* 1위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2위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3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 || [[파일:스릴러 뮤비.jpg|width=100%]] || || <[[Thriller]]>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던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제작해 [[뮤직 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https://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4789|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참고로 는 오늘날 미국에서 매년 [[할로윈]] 시즌만 되면 울려퍼지는 대표적인 [[https://www.billboard.com/articles/news/6746206/top-halloween-songs|할로윈송]]이 되었다. 2021년에는 [[빌보드 핫 100]] 19위까지 올랐을 정도... || 마이클의 앨범은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 마이클은 사운드에 유난히 민감하고 엄격한 귀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마이클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였던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이 밝힌 [[https://youtu.be/8OjqM6uHsY4|일화]]에 의하면 마이클이 <[[Billie Jean]]> 사운드를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무려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 근데 결국 2번째로 믹싱한 사운드가 최종 결과물로 채택된 건 함정..]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마이클의 앨범이 [[스피커]]나 [[플레이어]]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마이클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https://m.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2203219&menuid=104&articleid=9289&query=마이클잭슨|'마이클 잭슨' 특집]]] [[임진모]] 음악평론가도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마이클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마이클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은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사운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다. 특히 엔지니어들이라면 마이클의 음악은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http://news.sbs.co.kr/amp/news.amp?news_id=N1000612463&cmd=amp|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 &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2 페이지]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이준오 영화음악 감독이 아날로그 믹스의 바이블 같은 앨범이라고 [[https://www.0db.co.kr/xe/REVIEW_0DB/557517|칭하기도]] 한 1991년작 <[[Dangerous]]>부터는 사운드에 더더욱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은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다.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것이라 보면 된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다. >---- >ice J 음향엔지니어/ [[http://blog.naver.com/icej10/60104771571|개인 블로그]]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음원 서비스)|멜론]] 뮤직스토리 [[https://m.app.melon.com/musicstory/detail.htm?mstorySeq=5555|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Michael Jackson [Thriller] ]] ai 보컬이 등장한 후 많은 팬들이 여려 유명곡들을 마이클 잭슨 보컬로 편곡하면서 2020년대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